나와 시험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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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키운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자기 계발 시대. 능력이 없으면 경쟁에서 밀린다고, 입시를 위해, 다음에는 취업을 위해, 승진과 재산을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노력해서 능력을 갖추면 그에 맞게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바로 ‘능력주의’이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영국 노동당의 이론가였던 마이클 영이 1958년에 쓴 『능력주의』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2043년 영국을 묘사한 내용의 소설은 엘리트들이 ‘모두 똑같이 가르치는’ 교육으로는 승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능력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사회를 만드는 길로 나아가는 과정과 결과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한국의 압축적 산업화 과정은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가난에서 탈출하는 ‘능력주의’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능력과 공정을 외치는 목소리도 크다. 그런데 과연 한국 사회는 모두에게 ‘능력에 따라’ 보상을 해 주는 사회이긴 할까? 저자는 2018년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의 결과를 들며 능력에 따른 보상이나 능력과 노력에 따른 보상 중 어느 것이 공정하다고 잘라 말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가 클수록 좋다’라는 데 동의한 의견이 66%였고, ‘어떤 기준으로 차등을 두는가’라는 질문에 ‘근무 태도’를 든 대답이 43%였다는 것이다. 수행 평가를 할 때 누군가 아파서 참여 못 했는데 그것을 능력이 없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장애가 있는 학생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할까 하는 질문도 같은 사례이다.
능력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는 저자의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사전적으로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다. 취업과 관련해서는 학벌이나 외국어 등등을 떠올리지만 친구를 떠올리면 노래나 다정함, 운동 등 다양한 능력이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학력을 자격의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대다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이반 일리치의 지적이 날카롭다. 한편 세계가 온라인으로 연결되고 로봇과 인공지능(AI)이 실용화되는 시대는 학력만이 곧 능력이 되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기술과 기술 사이를 잇는 감각’ ‘미래를 예비하는 커뮤니케이션 등 종합적인 능력과 감각’을 꼽기도 한다. 결국 자신의 내면에 있는 씨앗을 보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시험만이 공정하다는 믿음, 한국의 ‘시험능력주의’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1980년 이후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10퍼센트가 간신히 넘었는데, 1990년이 되면 대학 진학률은 23퍼센트, 2000년에는 52퍼센트, 2010년에는 70퍼센트로 치솟았다. 이 높은 진학률은 한국의 압축적 성장의 원동력이자 결과지만, 지금은 그늘이 더 깊어지고 있다며 『나와 시험능력주의』는 그 그늘을 하나씩 짚어 본다. 십대 전체를 입시 공부에 매진해야만 하고,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다. 재난이 일어나도 시험을 먼저 걱정하며, 같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전형에 따라 서열을 매기며 자존감을 확인한다고도 한다.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화하려는 움직임을 현직 교사와 사범대 학생이 반대하고, 공공 의대를 세워 공공 의료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의대생과 의사들의 반발에 무위로 돌아가기도 했었다. 전교 1등만이 의사가 될 수 있다는 비뚤어진 의대생들의 주장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학벌이 “대한민국의 하나의 사이비 종교가 되었다”는 박노자 교수의 지적은 뼈아프고도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 학력, 좋은 대학에 간 공은 온전히 학생 개인의 것일까? 부모나 사회의 지원 없이 그 결과를 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 입시 결과만으로 평생 남보다 나은 인생 경로를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조금 낮은 보수를 받는 일자리로 시작하더라도 경험을 쌓고 재교육을 받으면 더 안정적인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시험능력주의가 조금이라도 줄어들려면 일해서 돈 버는 구조 즉 노동 시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입사 시험을 잘 본 것이 회사에 어떤 성과를 낸 것인가, 기업주의 리더십보다는 운과 흐름이 더 크게 작용한다, 상위 1%가 될 확률은 그야말로 1%다 등등 명징한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능력이 저마다 다른 것은 불평등을 낳는 원인이지만 또한 불평등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나와 시험능력주의』는 시험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감추고 나아가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들려주며, 이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파열을 내 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한 세상을 꿈꾸자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이 빠르게 진화하면서 이제 ‘사람의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거기에 고령화와 기후 변화 대응 같은 사회 경제적인 요소들이 끼어들면서,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나 갖춰야 하는 능력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나와 시험능력주의』는 이런 시대에 시험능력주의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짚어 보고,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들을 살펴본다.
저자는 미국 노동부가 꼽은 ‘2029년의 일자리 전망’에서 꼽은 건강과 돌봄 즉 보건 의료, 사회 서비스, 직업 훈련 등 일자리가 가장 많이 늘어날 수 있는 직종을 소개한다. 또 일본 정보기술기업 후지쓰가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인공지능 시대의 생존 기술’을 살펴보며, 미래에 생존할 수 있으려면 창의력과 사회적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잠재력과 창의성을 계속 키울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경과하면서 부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졌다. 몇몇 슈퍼스타 갑부들은 더 돈을 많이 벌었고 그에 반해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그림자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는 정말 노력과 능력만으로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기엔 불가능한 시대다.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안정된 삶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이유이다. 저자는 모두에게 일정한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 소득이나 시민 배당, 또 추첨 대의원제나 직접 주민투표 제도 등도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한 상상을 해 보자고 한다. 모두가 똑같이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사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말한다. 우리 능력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설령 능력이 조금 적어도 없어도 불행 속으로 떨어지지 않게 노력하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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