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개정판)
About this Book
그럼에도 우리는 엉망이 된 세계를 건넌다
사랑을 품은 채, 용기를 간직한 채
기발한 상상력과 빛나는 재치로 펼쳐 보이는
정세랑의 첫 SF 소설집
친환경 인쇄☓사진작가 서난달의 작품으로
새롭게 만나는 전면개정판!
남다른 상상력과 통통 튀는 재치로 사랑받는 소설가 정세랑의 첫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새로운 장정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옥상에서 만나요』 『피프티 피플』 『이만큼 가까이』와 함께 창비 ‘정세랑 컬렉션’으로 다시금 선보이는 이 소설집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평행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그러나 정세랑만이 그려낼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박진감 넘치는 서사를 한층 풍부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장을 섬세히 다듬고, ‘정세랑 월드’의 통일된 질감을 더하여 새롭게 소개한다.
정세랑은 특유의 흡인력 넘치는 서술과 탄탄한 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인물들로 읽는 이를 단숨에 끌어당긴다. 이 책에 수록된 여덟편의 단편은 각각 다채롭게 멸망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용기 내어 한발짝 더 나아가는 인물들이 돋보인다. 인류 문명을 향한 서늘한 비판과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전하는 정세랑표 SF 소설이 여전히 환한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이번 개정판은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작가의 뜻을 담아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 인증 용지를 사용한 친환경 에디션으로 제작되었으며, 영국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서난달의 작품으로 한층 감각적인 새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간다.
다채로운 멸망,
그 속에서 반짝이는 발랄한 희망
“수많은 이야기들이 결국 우리 세계의 빛과 어둠을 재현해 담으려는 시도임을 되새”(새로 쓴 작가의 말)긴다는 작가는, 소설집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멸망을 묘사하는 한편 그 속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찾아낸다. 「리셋」은 어느 날 갑자기 우주에서 내려온 거대 지렁이들이 지구를 집어삼키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지렁이들이 지구에 도착한 ‘리셋 원년’부터 그후 74년이 지나기까지 긴 시간대를 건너는 여러 인물들은 무너지는 땅에서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일구어간다.
마치 「리셋」의 평행우주를 그린 듯한 「7교시」는 23세기의 현대사 수업을 담은 짧은 소설이다. 대멸종을 맞은 21세기의 난폭함에 혀를 내두르는 미래 세대의 시선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을 반성하게 하는 동시에 더 나은 내일을 꿈꾸게 만든다. 이러한 작품들을 따라 읽다보면 명료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 닮은 존재가 아닌 닮지 않은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작가의 말)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명 중의 한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당신은 그 한명 쪽이에요
정세랑의 소설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사랑스러운 인물들이다. 그 어떤 모양의 우주일지라도 작가가 그리는 사랑만큼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11분의 1」은 직장을 그만두게 된 ‘유경’이 그 이유를 세세히 담아 친하게 지내던 동료 ‘혜정’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알게 된 ‘기준’을 만나기 위해 먼 타국의 땅으로 떠난 유경은, 상대를 다시 마주하자마자 “더이상은 하루도 이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37면)고 확신한다.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명 중의 한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씨는 그 한명 쪽”(38면)이라며 편지를 마무리하는 유경의 애틋함이 우리를 간질인다.
공식 명칭 ‘제2지구’, 그러나 모두가 ‘모조 지구’라고 부르는 놀이공원의 홍보 담당자이자 유일한 지구인인 ‘나’는 이 조악한 테마파크를 탈출하기를 꿈꾼다. 행성의 주인인 ‘디자이너’는 모조 지구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데, ‘나’가 사랑하는 ‘천사’도 그 피조물 중 하나이다. 「모조 지구 혁명기」는 ‘나’가 아픈 천사를 구하기 위해 디자이너를 찾아가며 펼쳐지는 모험을 그린다. 수상한 모조 지구에서도 “천사가 나를 골랐다는 말”(114면)에 가슴 가득 용기가 차오르는 ‘나’의 사랑을 응원하게 된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미싱 핑거’와 그런 미싱 핑거를 좋아하는 ‘점핑 걸’의 시간여행을 그린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은 짧은 분량임에도 상대방을 위해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는 마음만큼은 긴 여운을 남긴다.
절망 속에서도 빛나는 다정함이
무너지는 우주를 건너 당신에게 닿기를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자신의 목소리로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을 일깨우는 ‘승균’이 수용소에 격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승균은 수용소 안에서 자신처럼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능력을 지닌 ‘괴물’들을 만나고, 자유를 유예한 채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모두를 사로잡는 얼굴을 한, 그러나 그 얼굴의 생김새를 정확히 묘사하기 어려운 ‘연선’이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승균과 다른 수용자들은 연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가장 값진 보물을 바칠 수 있을까? 물거품이 될 각오를 하면서까지 목소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인류의 3분의 1이 좀비가 된 세상에서 옥탑방에 갇힌 양궁 선수 ‘정윤’의 생존기를 그린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역시 흥미진진하다. 서울 한복판이나 신축 원룸에 살았더라면 일찍이 좀비에게 물렸을지도 모르지만, 가난한 정윤은 두꺼운 철문이 달린 오래된 옥탑방에서 지낸 덕에 살아남았다. 참치 통조림을 조금씩 아껴 먹으며, 매일 좀비 하나씩을 활로 쏘아 죽여가며 두 계절을 버틴 정윤은 “난생처음으로 귀여웠”(248면)다고 느낀 연인 ‘승훈’, 그러나 지금은 좀비가 되어 살과 근육이 삭아버린 그를 적중할 날을 위해 마지막 화살을 하나 남겨둔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은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작은 하늘색 알약이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오용되어가는 과정을 건조하게 전한다.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147면)한 알약이라는 묘사가 서늘하면서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작가는 인간의 존엄, 자유와 생존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특유의 상상력으로 경쾌하게 그려내는데, 책을 덮고 난 이후 어쩐지 더욱 깊어지는 질문에 잠시 멈추게 된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세계는 좌절과 절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인류,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 권력, 반복되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문명의 맨얼굴을 SF적 상상력을 더하여 능숙히 드러내면서도 그 가운데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함께 환한 방향으로 걷고 싶”(새로 쓴 작가의 말)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따스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너질지도 모르는, 어쩌면 무너지는 중인지도 모를 우주를 건너온 다정함이 때맞춰 우리에게 도착한 순간이다.
차례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11분의 1
리셋
모조 지구 혁명기
리틀 베이비블루 필
목소리를 드릴게요
7교시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새로 쓴 작가의 말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책 속에서
그날 기준 오빠가 저를 가볍게 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습니다.
“너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널 한번 더 본 것만으로 그 추운 곳에 가서 죽을 수 있어.”
저는 기준 오빠의 기계로 교체되지 않은 허벅지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오빠의 목에 고개를 기대었더니, 더이상은 하루도 이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어요.(「11분의 1」 36~37면)
혜정씨, 보고 싶을 거예요.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명 중의 한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씨는 그 한명 쪽이에요. 혜정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도 됩니다. 천체투영관에서 태양계 파트를 틀어주실 때,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설명하실 때 곁들이세요. 저기에 친구가 산다고, 갈릴레이의 위성 중 하나에 친구가 산다고요.
우리가 또 만나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11분의 1」 38면)
나는 울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세상이 끝났다고. 아기들은 예방주사를 맞지 못할 거고, 성인들은 마흔이 되기 전에 죽어버릴 거라고, 미술관과 박물관들도 다 파괴되었다고, 우리가 세웠던 계획과 대책들은 아무 소용 없을 거라고……
“일단 그 구두부터 벗어.”
항상 절망 속에서 일해온 친구가 말했다.(「리셋」 48면)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고 있잖아요, 문명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소리예요.”
누군가 말했고 나는 리셋 이전의 괜찮은 부분은 보존되었다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리셋」 88면)
천사가 나를 골랐다.
“뭐, 어차피 자네는 구색 맞추기 용이니까.”
천사가 나를 골랐다는 말에, 그 뒤의 말은 의미 값을 가지지 않았다.(「모조 지구 혁명기」 114면)
밤마다 말 그대로 날개 아래에서 잠든다. 꿈결에도 지구가 그립지 않다. 천사는 날개가 없을 때부터 천사였다. 천사가 내게 주는 안도감은 우주를 샅샅이 뒤져도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을 종류이리라 확신한다. 고용 계약은 파트너 형태로 갱신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사를 위해서.(「모조 지구 혁명기」 120면)
“하지만 그전에는 이렇지 않았나요? 그 조그만 알약 전에는요? 끔찍한 일들이 없었다고 말해봐요. 그때도 사람들은 이 모든 참혹을 다 잊지 않았나요?”(「리틀 베이비블루 필」 147면)
돌아서자마자 연선의 얼굴은 희미해졌다. 그래도 손에 남은 감촉만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희미해질 기미가 없었다.(「목소리를 드릴게요」 197면)
그 둘을 볼 때마다 승균은 과거의 상태로 매끈히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수용소를 연선이 오기 전으로 되돌리기는 불가능했다. 괴물들이 털을 기르며 연선을 기억하니까.(「목소리를 드릴게요」 207면)
승훈은 대답도 없이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압권이었다. 그냥 있을 땐 아무리 봐도 미남은 아닌 승훈이었지만, 웃으면 미남이 되었다. 종종 그 같은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반경 70미터쯤이 환해지는, 얼굴 구조가 아예 바뀌는 듯한 대단한 웃음을 짓는……(「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238면)
끝이라 하니, 삭막한 소도시의 원룸촌도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풍경이었구나, 나의 세계는. 감성이라 할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가슴께가 찡해져왔다. 완벽한 풍경이었다. 하루를 더 살아남는다 해도, 그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다시는 내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사람에겐 어떤 완결성이 필요한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메달이 필요하듯이.(「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247면)
“난생처음으로 귀여웠었지.”
정윤은 승훈 특유의 미소를 따라 하려 노력했다. 살점이 사라져 잇몸이 그대로 드러난 승훈도 어떻게 보면 웃는 것 같았다.
내가 보낸 마지막 여름이 너랑 함께였던 게 다행이야.
내가 쏘는 마지막 과녁이 너라서 다행이야.(「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248~49면)
새로 쓴 작가의 말
이야기를 마친 후 삶으로 돌아와 여러 일을 겪다보면 가깝게 느끼며 썼던 이야기와 멀어지기도 하고, 멀게 느끼며 썼던 이야기와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늘 예측했던 것과 크게 어긋나 놀라고 말지요. 이야기를 표지석 삼아 갈팡질팡 헤매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근래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수업 자료로 활용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주의를 기울여주시고 계시겠지만, 더더욱 의심하며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소설가들은 화자에게 그럴듯한 말과 위험한 말을 번갈아 시키고는 합니다. 이입하기 좋은, 동의하고 싶은 인물일수록 가는 눈으로 살펴주시길요. 소설에 여러면을 만들려다보면 심술궂은 면이 생기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원체 분리되어 그려지지 않는 듯합니다. 디스토피아를 한껏 써서 그 어두운 미래의 진을 다 빼버리고 싶은, 가능성을 죽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결국 우리 세계의 빛과 어둠을 재현해 담으려는 시도임을 되새기는 요즘입니다. 함께 환한 방향으로 걷고 싶습니다. 신념이 꺾이고 무릎이 꺾일 때 공기 중에 띄워두었던 이야기들이 다시 힘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지쳤다가도 회복하고, 바닥났다가도 또 채우기로 해요.
2025년 봄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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