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About this Book
일국주의적 시각을 과감히 벗어던진
동아시아 학지(學知)의 출현
세계화 격동 속에서 요청받은 ‘한국학’의 새로운 정체성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학문으로서 한국학의 인식지평을 확장•심화하는 데 주력해온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그간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해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을 선보인다. 지난 2000년 출간한 『실사구시의 한국학』에서 제안의 형식으로 등장한 ‘한국학’이 21세기 전면화한 자본주의 세계화의 격동 속에서 요청받은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주체적 응답이기도 하다.
근대의 양 편향 가운데 하나인 일국주의적 시각을 탈피한 한국학을 제기한 이래 십여년간 한국학의 실사구시를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추구해온 성과가 전체 6부 19편의 글로 묶였다. 한국 근대문학•한문학의 해박한 지식과 차원 높은 안목으로 우리 근대학문의 성립과정과 그 동아시아적 의미, 글로벌한 환경에 처한 한국학의 위상을 성찰하고 ‘지역적 인식론’을 새로운 시대의 학문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20세기 내내 동서양 대립과 갈등의 결절점이던 한반도에서 한 사람의 지식인이 일생 동안 추구해온 동아시아 학지(學知)가 예리한 통찰 속에서 빛을 발한다.
왜 한국학인가, 왜 동아시아적 지평인가
동아시아와 한국학은 지역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명칭이다. 동아시아는 세계를, 한국학은 동아시아를 참조항으로 성립한다. 긴 시간 동안 동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문명공동체였다가 20세기에 대립과 갈등의 공간으로 변했고, 21세기 세계화 속에서 다시 분쟁과 갈등의 공간으로 호출되고 있다.
한국학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 이 책은 지역적 개념인 한국학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역사적 시간을 거슬러 20세기 전후 한중일 삼국의 ‘국학’ 성립과정과 이를 주도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자기인식을 고찰한다.
중국과 한국의 ‘국학’은 20세기 초 동서 대립의 역사적 위기상황에 대한 학문적 대응으로 성립했다. 일제시기 ‘조선학’의 탄생은 이 학문이 위기에 처한 민족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와 달리, 일찍이 18세기에 확립된 일본의 국학은 곧 국체(國體)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뿌리로 작동한다.
한중의 국학이 위기의 산물로서 방어적·소극적 성격을 띠었고 한시적 운명을 타고났다면, 치밀한 근대적 합리성을 갖춘 일본의 학문은 학지로서도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를 압도했다. 이 점을 인정해야만 서구 주도의 근대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 학적 사고의 지평이 열린다는 것이 동아시아라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역사적 고찰의 결론이다.
근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서 배울 것
그렇다면 혼란에 처한 20세기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추구했던가. 17세기까지 굳건하게 유지되던 중국 중심의 조공질서 체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흐름에 압도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 드디어 해체를 맞는다. 현실의 격변은 세계관의 전도를 불러왔다. 수천년 동아시아 역사·문화공동체의 바탕이던 중화주의는 붕괴했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갈등과 혼돈의 동아시아를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 어떤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것인가.’ 이는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절박한 과제였다.
『조선책략』으로 잘 알려진 황 쭌셴(黃遵憲)은 한중일 삼국의 친화와 미국과 연계하는 동아시아를 구상했다. 량 치차오(梁啓超)는 일본제국주의에 대립하여 중국중심주의에 경도된 동아시아를 그렸다. 신규식(申圭植)은 쑨 원(孫文)의 대아시아주의와 접합한 한중연대론을 통해 한국의 주권회복을 도모했다. 각기 다른 입장과 행동을 취했으나 독립적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이들의 과제는 한결같았다.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간 일본에 맞서 한중 양국에서는 고양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움직임이 분출했다. 민족적 인식에 획기적 전환점이 된 것은 1919년 3·1운동과 5·4운동이다.
3·1운동은 또한 중국 5·4지식인들이 한국을 동아시아의 대등한 일원으로 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과 5·4운동이 촉발한 신문화운동은 한국과 중국에서 공히 ‘근대’를 보편제도와 삶의 형식으로 추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본 중심으로 재편된 지역질서에 항거하면서 독자적 근대의 양식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제기된 자주독립과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는 실패한 채로, 한중 양국이 아직까지 완수하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좁게는 일국사적 관점을 넘어 3·1운동과 5·4운동을 재조명하는 것뿐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문명전환의 시간대에 새로운 동아시아의 지역질서를 모색하는 것은 오늘날 동아시아 지식인의 책무이기도 하다.
21세기 변화에 대한 주체적 응답, 지역적 인식론
이러한 모색에 필요한 인식론적 틀로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이 ‘지역적 인식론’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개념을 앞세우지만 여기에는 세기와 역사의 시간 개념이 고려된다. 역사적 현실성은 학문 탐구의 구체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지역 개념을 앞세운 동아시아학이 근대 서구와의 역사적 관계를 전제로 성립하고,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제기된 조선학이 새로운 역사상황에서 한국학으로 거듭나는 것이 지역적 인식론이다.
이러한 ‘지역적 인식’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더 절실해지는 ‘인식론적으로 재통합된 지식체계’의 필요성에 부응한다. 인문학의 위기, 사회과학의 위기, 나아가 학문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근대학문의 재편과 해체의 목소리 앞에서 새로운 인식론, 새로운 동아시아 학지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지는 중이다.
‘지역적 인식론’은 기존 근대학문에 대한 ‘인식론적 반역’을 감행한다. 중심?주변 관계의 해체를 통해 근대적 편견과 구획을 뒤엎음으로써 근대 논리체계와의 변별성을 갖는다.
지배?종속관계로 이어져온 중심?주변 관념의 해체, 자기 삶의 공간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고 중심을 상대화하여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방법론, 이를 통해 근대가 구획한 지리적·문화적·정신적 경계를 넘어 자국중심주의적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촘촘히 구획된 분과학문체계를 허물고 다양한 지식영역의 소통을 추구하며 각각의 현실과 현장을 중심으로 삼는 지역적 인식론. 이는 다시금 시작된 미국·일본·중국·러시아의 패권다툼 속에서 한반도의 학인(學人)들에게 더 절실한 과제이다.
오늘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지역적 인식과 방법론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제기하는 바탕에는 전쟁과 반목의 세기 동안 그 가장 첨예한 현장 한반도에서 한 사람의 학자로 살아온 저자의 정체성이 있다. 분단된 한반도라는 학문 탐구의 현장성을 강조하는 데는 이러한 통찰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글 ‘분단체제하의 한국에서 학문하기’는 해방 후 한국역사를 분단시대로 파악하고,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미래 구상을 밝히고 있다.
‘지금’ ‘이곳’이 학문하기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거듭 언급하는 것은 역사적 대립을 낳은 유럽중심주의·중국중심주의를 넘어설 지역적 인식이 여기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세계 차원의 냉전이 해소되었음에도 풀리지 않은 분단을 해결할 민족경륜에 대한 열망, 대립과 갈등을 넘어선 동아시아 학지의 요청이 큰 울림을 남긴다.
이 책은 21세기 한국학의 활로를 찾고 역사적 현실문제를 타개할 방법론을 추구하는 글들이 중심을 이룬다. 1세대 국문학자로서 ‘조선문학(국문학)은 무엇인가’를 묻는 데서 출발해 해방 전후 이념 대립 속에 다른 길을 걸어간 조윤제(趙潤濟)와 김태준(金台俊)의 문학연구 비교,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임화(林和)의 신문학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정약용(丁若鏞)의 공부법을 통해 살펴본 인문학의 총체성 회복의 방도 등 다채롭고 흥미로운 글들이 한데 묶여 중심 논지를 확장하고 구체성을 더한다. 이번에 한길사에서 함께 펴낸, 한국학의 뿌리인 실학의 현재적 의의를 탐색하는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도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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