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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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의 비극적인 코미디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는, ‘베케트(Samuel Beckett)’의 대표적인 희곡이며 연극작품이다. 이러한 연극 장르를 흔히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이라고 일컫는데, 여기서 ‘부조리(L’Absurde)’라는 개념은, 단지 불합리하다거나 조리에 맞지 않다는 식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 개념은, 동시대를 살았던 ‘카뮈(Albert Camus)’의 작품들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특히, 끊임없이 바윗덩이를 산등성이로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도달하면 이내 바윗덩이가 굴러 떨어져버리는 숙명을 떠안은 ‘시시포스(Sisyphos)’의 삶은, 인간존재의 본래적인 ‘부조리’의 상황을 여실히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조리’ 개념을 표현하는 예술가들 대부분은, 그러한 ‘부조리’의 상황에서 체념해버리고자 ‘부조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Nietzsche)’가 선언한 바처럼, 그러한 온갖 ‘부조리’를 넘어서서, ‘가장 위대한 긍정’에 이르고자 하는 저항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조리’ 개념은, 비단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비극의 체험에 의해서 초래된 것은 아니며, 지극히 고대적이며 본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고대 중국의 ‘장자’에게서는, 이러한 ‘부조리’가 ‘부득이(不得已)’ 개념으로서 표현되며, 그러한 ‘부득이’를 넘어서서 ‘소요유(逍遙遊)’에 이르고자 하는 과정론이 ‘장자’철학의 대개(大槪)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것이다. ‘고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죄다 각자로서의 여행자들이다. 자기만의 여행길을 어떻게든 걸어가야 하는, 고독한 여행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단 한 순간의 소통마저도 실현하지 못 하는 불통(不通)의 연속이다. ‘포조’나 ‘럭키’의 횡설수설처럼, 극 안에서 이러한 불통의 상황은 지속된다. 그러니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조리’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코미디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 ‘포조’와 ‘럭키’…. 이러한 관계들은 ‘부득이’하게도 서로에게 가장 근접한 지점에 배치되지만,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 한다. 납득할 수도 없다. 그저 ‘부조리’한 탓에, 서로가 서로에게 밧줄에 매인 듯이 끌려 다닐 따름이다. 그런 탓에 ‘고도’에는, 대부분의 문학적인 스토리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선과 악[善惡]’의 대립구조가 드러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별다른 관계를 갖지 않으며, 단지 ‘부조리’하게 서로 얽매이게 되어버린 관계일 따름이다. 관객의 관점에서, 얼핏 보면 빈곤하거나 학대받는 듯한 캐릭터들에게 ‘선’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일관되게 선한 인물들은 아니다. 그리고 부유한 권력자 캐릭터에게 ‘악’의 감정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는 결코 시종일관 악한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라는 전형적인 구조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처럼, ‘고도’ 안에서 인간존재들이 거처하는 사회체제는, 결코 ‘선과 악’의 단순구조로서 설명되지 않는다. ‘강과 약[强弱]’, ‘미와 추[美醜]’, ‘진과 위[眞僞]’ 등의 도식이라고 해도 별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어떻게든 ‘선의 편’에 서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정작 ‘선의 편’인지의 여부를 결정하기는 난해할 따름이다. 예컨대, 우리 역사의 경우, 불과 몇 십 년 전 일제식민지 시절은, ‘부조리’ 상황에 대한 아주 유력한 예시가 되어준다. 당시 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대다수의 민중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일제에 항거한 독립 세력은 무조건 선한 것인가. 일제에 협력한 매국 세력은 무작정 악한 것인가. 이는 단순하게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이런 ‘부조리’의 상황은, 21세기의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고도’를 독서하거나 감상하고서, 쉬이 ‘포조’는 ‘악의 편’이고, ‘나머지’들은 ‘선의 편’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는 아주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니체’가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시했던, ‘노예의 도덕’이 지닌 이면(裏面)의 잔혹성이라고 할 것이다. ‘포조’는 전형적인 악마가 아니며, ‘나머지’들은 전형적인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과정 안에서,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중용(中庸)’에서 논변하는 ‘시의적절함[時宜]’의 상황을 좇아, ‘지금 여기’에서 나름의 최선으로써 살아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에서 집단권력이 자꾸만 ‘선과 악’의 대립적 구조를 극명히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존속하는 데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집단권력은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윤리법칙들의 준수를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베케트’의 관점에 따른다면, 그것이 정의의 실현을 목적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부조리’의 이면을 여실히 보여줄 따름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포조’의 밧줄에 묶인 ‘럭키’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낄는지 모른다. 그런데 밧줄을 쥔 ‘포조’나, 밧줄에 묶인 ‘럭키’는, 서로의 ‘부조리’에 의해 그러한 상태에 처했을 따름이다. 때문에 밧줄에 묶여 온갖 학대를 당하면서도, ‘럭키’는 ‘포조’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결코 무거운 가방을 땅에 내려놓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현대에 이르도록, ‘백성’이나 ‘인민’이나 ‘서민’이나 ‘민중’이나 ‘대중’으로서 살아내야 하는 자들의 생존방식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금세 밧줄에 묶일 자격마저도 박탈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한 ‘럭키’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어떻게든 자기의 기득권을 존속해야 하는 ‘포조’들은, 결코 ‘럭키’에 대한 학대를 멈출 수 없다. 자칫 그랬다가는, 새로운 ‘포조’로서 권력을 차지하려고 하는 미래의 ‘포조’에 의해, 금세 권력을 박탈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조’가 먹다버린 뼈다귀를 주워 먹는다거나, ‘포조’에게 돈 몇 푼을 구걸하는, ‘에스트라공’을 안타까워하거나 혐오스러워 할 수 있는가. 따지고 보면, ‘지금 여기’에서 근근이 살아내고 있는 대부분의 서민대중은, ‘에스트라공’의 신세와 별다를 게 없다. 자본적 권력을 지닌 자들이 먹다버린 찌꺼기나마, 먼저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것이, 실로 서민대중의 역사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을 혐오스러워 하며 구토를 하는 ‘블라디미르’의 태도 역시, 안타깝기는 매한가지다. 그러한 생활방식이나 사유방식으로서는, 결코 현실세계의 일상적인 최하층의 삶조차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들의 연극놀음을 보며, 적어도 나는 배를 채울 밥도 있고, 잠을 잘 집도 있고, 출퇴근할 자동차도 있고, 돈벌이할 직장도 있고, 가정을 이룬 가족도 있으므로, ‘럭키’나 ‘에스트라공’이나 ‘블라디미르’보다는 나은 처지라면서, 기괴한 안도감을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안도감은, 사태의 근원적인 이면을 직시할 수 없도록 하는 심리적 장애일 따름이다. 이를 잘 파악하는 집단권력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이러한 체제 지배적 도구를 아주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베케트’는, 그 이면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佛家)’의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은, ‘절벽의 나무와 우물의 등나무[岸樹井藤]’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경전인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나그네가 들판에서 성난 코끼리를 만났다. 두렵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망치던 나그네는, 우물 하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우물가에 있는 등나무 넝쿨을 타고서, 우물 속으로 내려가 몸을 숨긴다. 그런데 우물 속에는, 독사가 우글거리며 나그네가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가 매달려 있는 넝쿨을,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쏠기 시작한다. 이처럼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고, 멈춰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벌집에서 흘러내린 꿀이 나그네의 이마에 떨어져 입속으로 흘러든다. 나그네는 매달린 채로 꿀맛에 취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인간존재의 상황은, ‘장자’의 시대로부터 ‘니체’의 시대에 이르도록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며, ‘니체’의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에도 역시 그러하다. 실로 이러한 것이, 인간존재의 삶이다. 그러한 온갖 ‘부조리’ 안에서, 잠시 달콤한 꿀맛에 취해 ‘부조리’를 실감하지 못 한다면, 결국 ‘부조리’는 해소되지 못 할 것이다. 이에 ‘베케트’는 ‘고도’의 이야기를 통해, 차마 ‘부조리’를 직시하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꿀맛에 취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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