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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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수식과 격식을 버리고 단순 명쾌한 문장으로 문단을 주도해 결국 정조의 문체반정을 이끌어 낸 장본인, 고금 학자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글쟁이라고 서슴없이 손꼽는 연암 박지원의 주옥같은 작품을 모았다. 연암에 푹 빠진 박수밀 교수의 정성스런 번역과 자상한 해제를 따라가다 보면 연암의 맛깔스런 문장과 혁신적인 사상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숨결까지 느낄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은 고금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글쟁이이자 실학의 큰 나무다. 창강 김택영은 그의 문장에 대해 천년의 역사 가운데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던 바라고 극찬했으며 퇴계와 율곡의 도학(道學),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과 더불어 조선의 세 가지 우뚝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도 연암을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이자 세계의 어느 문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연암집≫에는 이와 같은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삶에 대한 모든 글들이 담겨 있다. 그가 <초정집서>에서 언급한 ‘법고창신’과 <영처고서>에서 말한 ‘조선풍’은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의 정수를 보여 주는 정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산문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학 정신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연암집≫ 별집에 실린 ≪열하일기≫는 최고의 기행문학이자 사상서다.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의 두 가지 핵심 사상, 곧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하자는 이용후생의 사상과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 가난한 조선의 현실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자는 북학(北學) 사상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구성, 해외 진출 사상, 양반 사대부의 무능 비판, 상공업의 중요성, 이상 사회 건설 등의 주제 의식을 담고 있어 박지원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이른바 연암체라 불리는 고유한 문체를 사용해, 기존의 판에 박힌 글투를 과감하게 탈피했다. 전통적으로 지켜야 했던 바르고 고운 문체 대신 비속어를 적극적으로 끌어 쓰는 등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썼으며, 해학과 풍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본 번역서는 기존의 번역서들을 두루 참고하면서도 차별화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수많은 산문 가운데 연암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제 분류 및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암은 위대한 문장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가이자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이러한 면모들을 골고루 균형 있게 담아내고자 했다. 독자들이 이 번역서를 읽고 위대한 문장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연암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연암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별했다.
둘째, 번역은 원문에 최대한 충실하되 가장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므로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선은 원문 그대로를 충실히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풀어 쓸 경우 자칫 연암의 간결한 문장과 맛깔스런 은유를 놓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풀어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쉽게 이해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원문 고유의 색깔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사람의 자호(字號)만 밝힌 경우는 이름까지 적었으며 지명은 가능한 한 오늘날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때는 호(號)만 써도 독자가 그 이름을 알 수 있었기에 따로 이름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연암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표현했을까를 생각하며 번역을 진행했다.
셋째, 번역자의 주관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언어로 쓰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일야구도하기>에서 ‘今吾夜中一夜九渡’의 일야구도(一夜九渡) 번역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홉 번이나 건넜다’라고 번역했으나 옮긴이는 ‘아홉 번 건넜다’라고 번역했다. ‘이나’라는 표현은 번역자의 주관이 개입된 것인데, 이 경우 글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 주는 장점은 있으나, 연암의 세계관이 매우 냉철하고 객관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가능한 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번역했다. 다른 글들도 이와 동일한 기준에서 번역에 임했다.
넷째, 각주는 최대한 줄였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 각주까지 읽어야 이해가 되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본문만으로도 의미가 쉽게 전달되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는 원문에 나와 있지 않은 최소한의 정보를 첨가한 경우도 간혹 있다. 특히 긴 고사를 짧은 몇 마디 문장으로 표현한 원문의 경우, 각주로 달아 주기보다는 본문에서 최대한 요령 있게 압축해서 번역하고자 했다.
한편, 작품마다 해제를 달아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다. 연암의 작품들은 감춤의 미학을 지향한다. 생각을 직접 전달하지 않고 비유와 알레고리 등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그 의도한 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정보들을 다루어 줌으로써 독자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다. 그렇지만 연암은 작품 한 편 한 편마다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므로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열하일기≫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산문은 선별해 수록했다. 소설 가운데 연암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고 판단되는 몇 작품을 수록했다. 오늘날 소설로 취급되는 연암 작품들은 사(史), 혹은 전(傳)의 맥락에서 쓰인 것임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책을 읽고 박지원의 새로운 문학 정신과 세계관, 한 인간으로서의 삶과 지식인으로서의 혜안을 함께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품을 번역하면서 박지원의 문장력과 생각의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글은 오늘날 그대로 옮겨 놓아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신선하다. 절제된 언어, 감칠맛 나는 비유, 상식을 뒤집는 싱싱한 생각, 세계에 대한 냉철한 시선 등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다. 맛난 음식을 맛볼 때와도 같은 즐거움을 독자들도 함께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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