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간본)승암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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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升菴詩話』는 명나라 楊愼(1488~1559)이 撰한 것으로 조선에서는 허균(1569~1618)의 『학산초담』(1593년)부터 이 책의 인용이 보이기 시작하여, 이수광(1568~1629)의 『지봉유설』(1614년)에 대거 인용되었으며, 신흠(1566~1628)은 양신의 시 비평 및 시 全篇의 기록들에서 選하여 『鐵網餘枝』(不傳)를 엮기도 했다. 승암의 시화는 이익·이덕무·이규경에 의해 애독되고 인용되는 등 조선후기까지 줄곧 많이 읽혔다. 李喜之(1681~1722)는 “이수광의 시론은 오로지 『승암시화』에서 나왔다”(『李喜之漫筆』, 필사본 1책, 국사편찬위원회 소장)고 이수광을 혹평하였고, 正祖는 1791년 抄啓文臣 親試 및 성균관 유생의 응제문으로 내린 策問 「俗學」(『弘齋全書』 권50)에서 俗學의 범주와 해당 書目을 언급하고 있는 바 세 범주의 하나로 ‘淹博之學’을 들고 楊愼과 季本의 流派라고 비판하였다(나머지 둘은 經義之學 - 豊坊孫鑛之派와 文章之學 - 七子五子之派이다). 실제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文章部」를 비롯하여 많은 곳에 양신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이수광은 양신 학설의 오류를 일부 교정하는 등 객관적으로 수용한 면도 있어서 이희지의 위의 언급은 다소 과도하다고 하겠으나 양신 학설의 영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참고로 이덕무는 『淸脾錄』에서 “이수광은 조선의 楊愼이다.”라고 긍정적 측면에서 말한 바 있다). 양신의 학문은 ‘博學’과 ‘考證’으로 대표되고 그것은 그의 방대한 저술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청대 학풍을 휩쓴 고증학은 명나라 양신에게서 이미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의 학문방법에서 청대 고증학을 비판적으로 보았던 正祖의 시선에 양신의 학술경향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동시대이자 후배 문인인 왕세정(1526~ 1590)이 양신의 학문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기실 왕세정의 『예원치언』도 승암의 저술을 상당 부분 祖述하고 본뜬 것이다(신흠 「鐵網餘枝序」 참조). 그의 박학·고증학과 시화서 『승암시화』는 明代는 물론 朝鮮에서도 내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본서의 全譯은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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