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이, 화이

담이, 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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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 우리 둘만 살아남았다

하필 우리 둘만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걸어다니는 시체로 변한다. 담과 화이, 두 사람만 빼고. 재앙이 왜 두 사람만 비껴갔을까. 하수관 청소부인 담과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는 화이는 생판 남이지만 그들에겐 말 못할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도태남녀’였다. 직장만이 아니라 사랑의 세계에서도 그들은 빛이 안 드는 지하에 살았다. 마침내 세상이 망하자 ‘구원’ 받은 두 사람이 만난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건 비호감과 불쾌감과뿐. 하나도 맞는 게 없는 그들은 함께 생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재앙의 모습이 아닐까. 휩쓸려 다니는 시체를 풍경으로 창세기 절망편이 시작된다. 

■ 기다려 온 멸망, 그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시체로 변한다. 담과 화이, 두 사람만 빼고. 초자연적 현상이 왜 두 사람만 비켜 갔을까. 담과 화이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지만 그러고 보면 말 못 할 공통점도 있다. 두 사람 다 스스로를 낙오자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더욱이 둘 다 지하에서 일하는데, 사랑과 연애의 세계에서 또한 그들은 빛 한 점 안 드는 세계에 거주한다는 점에서 지하는 그들 실존의 위치이기도 하다. 거부당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시체가 즐비한 이곳은 마침내 도래한 ‘그들만의 세상’이자 비로소 ‘완벽해진 세상’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정말 ‘구원’ 받은 걸까? 문제는 그들 사이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 싫어하는 소설

『담이. 화이』는 ‘싫어하는 소설’이다. 서로를 싫어하는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감정이 너무 익숙해서 우리 마음의 거울을 보는 것 같다. 둘의 관계는 한마디로 상극이다. 담은 쉬지 않고 일한다. 시체를 몰아서 강물 속으로 빠뜨리는 일. 그렇게 하는 게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담은 점점 더 그 일에 몰입한다. 그런 담의 눈에 비친 화이는 게으른 데다 사치나 일삼는 한심한 여자다. 그러나 화이 입장에서 본 담 역시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며 으시대는 ‘하남자’일 뿐이다. 시체가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것은 담과 화이 두 사람이지만, 이들의 생존은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은 감정이 미움과 혐오라고 말하는 것 같다.

■ 창세기 비틀기

사람들이 시체로 변하기 전, 사는 게 힘든 화이는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는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모두 7장으로 구성된 소설 『담이, 화이』는 창세기를 비틀어쓴 종말기다.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담은 침례의식을 연상하는 행위 속에서 스스로를 세상의 끝 사람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의 첫 사람일 거라고 의미 부여한다. 과장된 자의식으로 위축된 자존감을 포장하는 것이 담이라면 화이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사치품에 탐닉하며 만들어 낸 허위의식으로 바닥난 자존감을 위장한다. 성서 속 아담과 하와가 태초의 인간이라면 소설 속 담과 화이는 최후의 인간이다. 그러나 이것도 최후는 아니다. 두 사람에게는 아직 최후가 오지 않았다.

■ 소설가 배지영의 재발견

2019년 출간한 소설집 『근린생활자』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작품은 배지영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해학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면서 이전 작품들보다 한층 성숙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서 작가의 새로운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세 권의 장편소설과 2권의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는 2008년, 친숙하면서도 섬뜩한, 생생하면서도 야성적인 언어로 일상적 공간에 난무하는 폭력을 실감 나게 그리며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줄곧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 우리 사회의 어둠과 광기, 개인의 본능적 욕망과 괴물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잊지 않던 작가가 이번에는 조용한 공포의 극단을 선보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침묵의 재앙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하나둘 실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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