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2

논어 2

About this Book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전해주는 인간존재 본연의 감성 에세이 ‘공자’의 삶을 대변하는 말은 ‘주유천하(周遊天下)’다. ‘주유천하’는 말 그대로 천하를 두루 여행했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여행자로서의 ‘공자’인 것이다. 필자도 대학원에서 중국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하면서, 중국의 전역을 몇 년에 걸쳐 다녀보았는데, 천하를 주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소나마 체감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다. 바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다. 이는 ‘공자’가 70세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경지였다.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철학사상을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논어’ 전체를 집약하는 한 마디 역시 ‘종심소욕불유구’라고 할 것이다. ‘종심소욕(從心所慾)’은 자기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불유구(不踰矩)’는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대로 해도 결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혹자는 이러한 경지가 자칫 일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 하거나, 자기의 마음을 억지로 억제하거나 억압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 지조차 잘 알지 못 하므로, 애당초 ‘종심소욕’에 해당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인간존재의 마음 안에는 온갖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서양의 심리학에 의한다면,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상태에서의 욕망을 지칭한다. 그러하다면 과연 그러한 욕망 자체가 죄다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불유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를 성인이라면서 숭앙하는 것이다. ‘공자’는 자기의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법도에 전혀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종심소욕불유구’를 논할 만한 나이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청춘의 시절을 이미 살아낸 필자로서는, 이제 자꾸 중년의 삶에 대한 ‘공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이 40에는 자기의 중심이 서서 현혹되지 않았고, 나이 50에는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그리고 ‘논어’ 양화(陽貨)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40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면, 그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공자’에 따른다면, 필자의 나이쯤에는 이미 자기 삶의 중심을 갖고서 세상사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고, 이내 하늘이 나에게 명령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여전히 온갖 세상사에 온통 휘둘리고만 있으며, 당최 몇 년이 흐른 후에도 천명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들만큼 잘 살아내지 못 하는 탓에, 늘 남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으니, 아무래도 끝장난 인생인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만이, ‘공자’의 소중한 가르침에 그나마 다소라도 부응하는 일이리라. 중국인들에게 ‘공자’는 무한한 민족적 자긍심을 주는 존재다. 예컨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야구선수들을 활약상을 볼 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민족적인 자긍심을 느낄 것이다. 박찬호, 추신수, 류현진, 강정호…. 이런 이름들을 들을 때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에게 어떤 실질적인 이득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공자’를 프로야구선수와 비유한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공자’의 존재는, 마치 현실세계를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문명에 가장 잘 적응하면서도 동시적으로 가장 잘 맞서는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처럼,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논어’를 독서하고 ‘공자’의 삶을 공부한다고 해서, 어떤 실제적인 이득이 발생할 리는 없다. 더욱이 현대처럼 첨예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목적하는 자본적 이익의 발생은 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논어’를 읽는 일은, 삶의 무한한 자긍심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논어’가 인류의 고전이 지닌 미학적 본질을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서, 현실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업의 형태는 경비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경비(警備)는 말 그대로 ‘경계를 갖춘다’는 의미이며, 경계(警戒)라는 것은 무언가를 주의하여 살피며 돌보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이 경비하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저 그 대상이 다양할 따름이다. 예컨대, 부모는 자식을 경비한다. 선생은 학생을 경비한다. 경찰은 시민을 경비한다. 군인은 영토를 경비한다. 자본가는 자본을 경비한다. 사업가는 사업을 경비한다. 금융가는 금융을 경비한다. 정치가는 정치를 경비한다. 비단 직업적인 활동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삶의 활동이라는 것이, 실상은 살피며 돌보는 일이 아닌 바가 없다. 그렇게 ‘공자’는 천하를 경비한 것이다. 다만, ‘공자’가 경비하는 대상이 일반적인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이 세계 자체였던 것이다. 인류사에 위인이나 성인으로서 기록된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공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 등, 인류의 영원한 리더로서 자리매김 된 인물들은, 대체로 천하로서의 세계 그 자체를 경비한 인물들이다. 필자는, 살아온 날들을 회상할 때면, 필자보다 먼저 살아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처럼, 지나온 삶에 대한 온갖 회한이 먼저 찾아든다. 그래서인지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회한으로나 기억되는 과거의 시절로, 굳이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별로 없다. 물론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과학기술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하튼 삶이란,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 교리적 바탕으로 삼는, 온갖 상상과 갖은 이론으로써 꾸며 둔 죽음 이후가 아니라, 다만 ‘지금 여기’의 일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 일이 어떠한 일이든,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이, 곧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공자’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죽음에 대해서 묻는 ‘계로(季路)’에게, “삶도 미처 알지 못 하는데,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未知生, 焉知死.]”고 대답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제, 삶의 청춘보다는 삶의 황혼이 좀 더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세월이 그만큼 흘러버린 것이다. 어지간히 살아낸 이들이라면, 대부분은 이러한 생각을 할 것이다. 시나브로 세월이 금세 흘러버렸다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좋은 인연[善緣]’은 선연으로, ‘나쁜 인연[惡緣]’은 악연으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게도 되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자잘한 삶을 살아내는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자잘한 ‘종심소욕불유구’를 실현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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