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과 정신이상 항변

헌법과 정신이상 항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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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지름 10m, 두께 30mm짜리 공이 있다. 이 공은 날카로운 도구로 찌르지 않는 한, 잘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탄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공도 표면 전체에 무수히 균열이 가면 지우개 조각처럼 부스러기가 떨어지게 되고, 그런 균열이 많아질수록 탄력도 줄고, 큰 힘을 주지 않아도 찢어질 수 있다. 날카로운 도구로 찌르는 경우에 비하여 서서히 진행되는 이런 파괴가 오히려 위협적이다. 뜻하지 않게 눈앞에서 풀썩 주저앉아버리기 때문이다. 동쪽끝에 서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공의 표면을 움켜쥐고 동쪽으로 잡아당기면 공은 잡아당기는 힘만큼 동쪽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이 공은 동쪽으로 당긴다고 하여 동쪽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공 스스로 중심을 잡고 제자리를 지키도록 고안된 것이기에 공 전체가 동쪽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움켜쥐었던 부분에서만 늘어나게 된다. 공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자기앞의 공이 어디로 옮겨간 것이 아니므로 동쪽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무심하다. 그렇지만 비밀이 오래 유지되기는 쉽지 않기에 이 소문이 광장으로 퍼져나간다. 이번에는 공을 늘려서 만족스러워하는 동쪽끝 사람의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공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역시 공은 잡아당기는 부위만큼, 잡아당기는 힘만큼 늘어났다. 공을 잡아당긴 사람들은 만족했다. 공을 잡아당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이고, 공을 잡아당길 때마다 ‘소수’의 이익이 늘으났으며, 공을 잡아당기지 않은 ‘다수’의 이익이 줄어들지도 않았으므로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매일 더 많은 곳에서 공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러다보니 공의 모양이 마치 톱날처럼 튀어나온 곳은 튀어나오고, 들어간 곳은 들어간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물론 튀어나온 부분의 두께는 30mm보다 얇았고, 손으로 공을 잡아당기지 않았지만, 공을 잡아당긴 사람들의 주변에 있는 공의 두께도 30mm보다 얇았다.

사실 사람들이 잡아당겨서 커진듯이 보이는 튀어나온 부분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 만큼 커진 것이 아니다. 단지 튀어나와 있으므로 상당히 커진듯이 보일 뿐이다. 게다가 공의 두께가 얇아졌기 때문에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해치게 되었다. 외부의 공격이 없이도 공이 파괴될 위험성이 높아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대에 돌을 담아서 개천에 둑을 쌓을 때, 똑같은 높이로 쌓더라도 모두 3겹으로 쌓고, 한 두 곳에는 2겹으로 쌓았다고 하면, 홍수때 제방이 무너지는 것은 2겹으로 쌓은 지점에서 둑이 터지기 때문이듯이 두께가 얇아진 지점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볼 것이고, 이런 지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이 맥없이 터져버리게 될 것이다. 공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2인 이상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한 공간’은 ‘평화구역’을 의미한다. 이 평화구역이 적절한 넓이로 설정되어 있을 때,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다시 ‘애국심’을 강조할 필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과거 황제가 통치하던 제정시대에 국가란 황제의 것이었으나,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란 결국 우리 시민정신을 갖춘 민주시민들의 사회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국익을 위하여 혹은 국가를 위하여 어떤 행위를 하고 양보를 하자는 호소를 ‘권위적’이라고 비난하기에는 너무 때늦은 감이 있다. 이 나라는 우리의 것이고,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나라이지, 현재 집권하고 있는 정당이나 권력자, 대통령, 국회의원들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는 ‘임기’가 있지만, 이 땅의 주인인 우리, 우리 후손들의 어버이인 우리에게는 ‘임기’가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헌법소원’하기를 임금님의 궁궐문 앞에 걸린 신문고 치는 것처럼 여기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사료를 찾아보면 ‘신문고’ 울리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던 듯 싶다.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사유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고, 신문고를 두드린 백성은 몽둥이로 맞으면서 문초를 받게 되어 있었지 사극에서 보듯이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편안하게 고해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문고와의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헌법소원은 한 나라의 최고법인 ‘헌법’과 관련하여 호소를 하는 것이다. 헌법은 판단을 구하는 양 당사자 중 어느 한편을 든다는 것이 처음부터 곤란한 지위에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민법이나 형법과 같은 개별법은 구체적 권리관계에 대하여 다투거나, 억지를 부리는 측에 대하여 국가가 강제력을 행사하는 등으로 조력을 하게 되지만, 헌법적인 내용은 주로 구체적 권리관계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A가 “B에게서 어떤 권리를 박탈하고 나에게 달라”고 요구했을 때, 헌법재판소에서 그 권리를 A에게 주어야 할 법적근거를 찾아내고 A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과연 공익에 합당한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과거와 같이 ‘헌법소원’ 사안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라면, 헌법소원의 존재의의를 찾기 쉽겠지만, 지금처럼 침해의 대상이 개인이거나, 단체, 제도, 가치관 등과 관련되는 상황에서 헌법소원을 허용하여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국민화합’이 아니라 ‘국민분열’을 가져오고, 이러한 다툼이 많아지고, 다툼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더 많이 내어 놓을수록 ‘공익의 영역’이 줄어들게 된다고 할 것이다. 규범의 존재의의는 ‘내 땅 넓히기’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평화롭게 공존하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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